스티븐 김 소개 | 스티븐이 살아온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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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김의 누나가 전하는 스티븐 김이 살아온 길

출생

제 동생 스티븐 김(한국명: 김진우)은 1967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제 22주년 광복절 기념일에 서울의 한 작은 병원에서 태어났습니다.

출생 당시 미숙아로 태어난 어린 스티븐은 따뜻하고 헌신적인 어머니의 사랑으로 건강하고 튼튼하게 자라났습니다. 어머니는 늘 가족의 건강을 생각하시어 음식 장만 하나에도 세심한 관심을 기울이셨고, 행여나 우리 남매에게 부족한 것이 있을까 항상 신경을 쓰셨습니다. 어머니는 사랑과 지성이 넘치는 분이셨습니다. 우리 남매는 어머니에게서 피아노와 원예를 배웠고, 정원을 가꾸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바쁜 일정과 잦은 출장으로 집을 자주 비우셔야 했던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워주시려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어린 시절

친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 두 분은 모두 스티븐이 태어나기도 전에 한국전쟁 중에 돌아가셨습니다. 저와 동생은 어머니와 할머니의 각별한 보살핌 속에서 자라났습니다. 특히, 외할머니는 스티븐을 극진히 아끼셨습니다. 스티븐의 탁월한 역사감각과 시대 의식, 유머 감각은 모두 외할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입니다. 한국전쟁으로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외할머니는 33세 젊디 젊은 나이에 장녀인 저희 어머니를 포함하여 어린 네 아이를 홀로 키우셨습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어머니는 겨우 열 살을 갓 넘긴 나이였고, 가장 어린 동생은 고작 생후 3개월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저희 외할머니야말로 한국의 비극적인 현대사를 온몸으로 체험하신 분이십니다. 저와 스티븐은 강인하고 불굴의 의지를 가진 외할머니를 본받으며 자라났습니다.

외할머니는 한국 현대사의 격동기 속에서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신 강인한 분이십니다. 외할머니는 일제 강점기 잔혹한 식민지 탄압을 거쳐 한국 전쟁이 남긴 고난을 딛고 극복하셨습니다. 남편을 전쟁 중에 먼저 떠나 보내고, 이후 계속된 가난과 불안 속에서도 홀로 네 아이를 키우며 행여나 아버지 없는 아이들이라는 소리라도 들을까봐 늘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한국전쟁의 아픔과 상처를 딛고 조국의 번영과 근대화를 염원했던 외할머니의 소망과 강한 의지를 어린 스티븐은 곁에서 그대로 보고 배웠습니다.

외할머니가 몸소 살아오신 삶을 통해 스티븐은 학교에서 통상적으로 가르치는 수준을 넘어 격동의 한반도 역사 뒤에 숨겨진 평범한 사람들의 고뇌와 희망을 알게 되었습니다. 잔혹한 전쟁의 잿더미에서 그들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오랜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이 야기한 빈곤과 파괴를 어떻게 분연히 극복해 냈는지 등을 스티븐은 알게 되었습니다. 외할머니는 스티븐에게 어떠한 역경과 고통 속에서도 고결한 인품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결연한 의지로 가득했던 외할머니의 삶은 곧 전쟁의 파괴와 절망을 이겨낸 대한민국의 역사이자, 스티븐의 영원한 정신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스티븐은 일곱 명의 외손주 중 외할머니가 가장 아끼신 외손자였습니다. 외할머니와 스티븐은 단어 놀이를 함께 즐겨 했고, 짓궂은 장난을 치거나 수준 높은 유머를 구사했습니다. 스티븐은 영리하고 카리스마가 넘치는 아이였습니다. 외할머니는 그런 스티븐을 각별하게 대하셨고, 스티븐의 총기 넘치는 이야기와 유머를 좋아하셨습니다. 나머지 우리들은 그 두 사람이 치는 장난에는 끼지도 못했습니다. 누나인 저도 그저 외할머니와 스티븐을 따라가려고 고군분투했던 기억이 납니다. 1998년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기까지, 스티븐은 미국에서 기회가 될 때마다 한국을 방문하면서 외할머니와 각별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자수성가하신 분입니다. 아버지는 매우 총명하고, 호기심 많고, 재미있고, 운동을 좋아하시는 분이었습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했을때, 영국인 가정에서 시중을 들면서 틈틈이 영어를 배우셨고, 그 와중에 학업에 전념하여 중고등학교 과정을 마치셨습니다. 이후 미국과 호주 군기지에서 심부름을 하는 고단한 생활 속에서도 대학입시 준비를 게을리하시지 않았고, 결국 모든 사람들이 선망하는 명문대에 진학하셨습니다.

서울대학교를 졸업하신 이후, 아버지는 이화여대를 졸업하신 어머니와 곧 결혼하셨습니다. 한창 성장 가도에 있던 무역회사에 취직하신 아버지는 해외 출장이 잦으셨습니다. 아버지는 당시 영어를 할 줄 아는 몇 안되는 직원 중 한 명이었고, 해외 고객을 만나 영업수주를 성사시키는 것은 언제나 아버지의 몫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잦은 해외 여행을 통해 다양한 문화와 사람들을 접하게 되었고, 관용과 열린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되셨습니다. 엄격한 교육을 통한 건강한 정신과 강인한 신체의 중요성도 알게 되셨습니다. 아버지는 스티븐에게 당신이 중요하게 생각하신 이런 자질들을 실천해 나갈 것을 항상 당부하셨습니다. 아버지는 해외에서 잊지 않고 스티븐에게 엽서를 보내오시곤 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라도 여러 해 동안 자주 외국에 체류해야 했던 아버지의 빈 공간을 어린 아들이 조금이라도 덜 허전하게 여길까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였습니다. 아버지는 한국에 돌아오실 때마다 스티븐을 위해 장난감 자동차를 꼭 사가지고 오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어린 스티븐이 모은 장난감 자동차는 수백 개에 이릅니다. 어린 스티븐은 아버지가 보내오시는 엽서를 읽고 또 읽으며, 또 아들을 생각하며 사가지고 오시는 장난감 자동차를 가지고 놀면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곤 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아버지와 함께 전세계를 누비리라 마음 속으로 희망하였습니다.

업무상 30개국 이상을 방문하신 아버지는 열린 사회의 자유로움과 관용의 미덕을 몸소 경험하시게 되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살면서 자식들이 자유롭고 창의적인 교육을 받기를 염원하신 아버지는 마침내 1976년 가족과 함께 “기회의 땅” 미국으로 이주하셨습니다.


미국 생활

저희 가족 네 명은 1976년 9월, 유대인 중산층이 다수를 이루는 미국 뉴욕 브롱스 북단, 리버데일이라는 마을에 정착하였습니다. 스티븐과 저는 공립학교 81번에 각각 3학년과 5학년으로 전학하였습니다. 스티븐은 비록 영어도 잘 못하고 수줍음을 많이 타는 아이였지만, 학업에 뛰어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학교 선생님들이 스티븐이 다른 학생들에 비해 월등히 뛰어나다고 평가하여 스티븐은 결국 6학년을 월반하였습니다. 스티븐은 중학교 141번을 졸업했고, 이후 교복착용과 두발 규율 등을 엄격히 지키는 천주교 예수회(Jesuit) 남자 고등학교인 포담 프랩 스쿨(Fordham Prep School)에 진학하였습니다.

학교에서는 영어를 못하는 외국인 학생들을 위한 특별한 지원이 없었고, 어머니도 영어가 서툴르셨기 때문에, 우리 남매의 교육은 거의 전적으로 아버지가 도맡아 하셨습니다. 매일 저녁, 아버지는 우리 남매에게 찰리브라운과 스누피 그림책을 읽으면서 영어를 배우게 하셨습니다. 찰리브라운은 우리 남매가 읽은 첫 번째 영어 책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본문 전체를 손으로 베껴 쓰게 하셨습니다. 스티븐과 저는 스누피, 루시 그리고 다른 등장 인물들이 쓰는 단어와 문장을 반복하고 서로 물어보면서 그렇게 함께 영어를 공부하였습니다. 우리 남매는 서로의 숙제도 도와가며 했습니다. 영어가 서툴렀던 초기에는 선생님이 내준 숙제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파악하는 데에만 시간이 한참 걸렸습니다. 우리 남매가 목표로 삼았던 최상위권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공부해야 할 것이 아주 많았습니다. 우린 마치 물에 빠진 사람들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헤엄쳐서 살아남거나, 아니면 물 밑바닥으로 가라앉는 두 가지 상황만이 우리에겐 있었습니다. 동생과 저는 헤엄쳐서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습니다.
미국에서의 초기 몇 년은 비록 힘들기는 했지만, 동생과 함께 지낸 소중한 기억으로 가득합니다. 둘 다 친구 하나 없이 힘 센 동급생들에게 괴롭힘을 당했지만, 스티븐과 저는 서로에게 가장 믿고 의지하는 친구가 되었고,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매일 함께 쓰던 아파트 10층 창 밖으로 하늘을 바라보면서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하기도 하고, 때로는 서울에 두고 온 친구들을 그리워하기도 했습니다.
청소년 시절, 스티븐은 깡마르고, 키가 컸고, 운동을 아주 잘했습니다. 이 때부터 시작한 수영에 스티븐은 뛰어난 실력을 보였고, 고등학교 재학 시절에는 테니스 주전 선수로 활약하기도 했고, 나중에는 골프를 배웠습니다.
스티븐은 전형적인 여느 또래 아이와 다름없었습니다. 동생은 저와 함께 무더운 여름 날, 자전거를 타고 곳곳을 돌아다니기도 했고, 수영을 하거나 점심 때는 햄버거와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고, 그가 좋아하던 포도맛 청량음료를 마시기도 하고, 야구 카드를 모으는 재미에 흠뻑 빠져있기도 했습니다. 스티븐이 11살 때였습니다. 어느 날 저녁식사 시간에 아버지는 땀으로 범벅이 된 야구복을 입고 있는 스티븐을 보시면서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그래, 오늘 뉴욕타임즈의 사설 내용은 뭐였는지 말해보렴.” 스티븐은 침만 꿀꺽 삼켰습니다. 다음날부터, 스티븐은 뉴욕타임즈의 사설면에 실린 내용은 모두 알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스티븐은 독서광이었습니다. 열네 살이 되기도 전에 스티븐은 헤밍웨이가 쓴 책을 한 권도 빠짐없이 다 읽었습니다. 열일곱 살에는 플라톤의 국가론을 읽었고 고대 그리스 철학(특히 소크라테스이전의 철학)과 실존주의자에게 매료되었습니다. 그러나 스티븐이 책만 아는 책벌레였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스티븐에게 지성과 건강한 심신을 길러야 한다고 가르치셨다면, 어머니는 스티븐에게 따뜻함과 열정을 가지고, 어려운 이웃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스티븐은 매주 성당에서 성경공부를 가르쳤고, 지역 병원에서 봉사활동을 했으며, 맨하탄에서 꽃 가게를 하셨던 어머니를 도와 꽃 배달을 했습니다.
부모님은 스티븐을 브롱스에 있는 천주교 예수회 산하의 사립학교인 포담 프랩에 보내기로 결정하셨습니다. 포담 프랩에 진학하면서 스티븐은 예수회와 그 교육방식을 따르게 되었고, 깊이 경도되었습니다. 동생은 한때 예수회 신부가 될 것을 진지하게 고려하기도 했습니다. 포담을 졸업한 후, 스티븐은 여름방학 동안 영국 옥스포드 대학에서 셰익스피어를 공부하였습니다. 이 때 키운 영문학에 대한 그의 사랑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스티븐은 지금도 대화와 이메일, 브리핑에 그의 가장 “친한 친구들” 중 몇몇 – T.S. 엘리엇 (T.S. Eliot), 예이츠 (W.B. Yeats), 오든 (W.H. Auden) – 의 말을 종종 인용하곤 합니다.
스티븐은 조지타운대학교 외교학과(Georgetown University’s School of Foreign Service)를 우등 졸업하고, 하버드대(Harvard University)에서 국가안보(National Security)로 석사학위를, 그리고 예일대(Yale University)에서 외교사와 군사학(Diplomatic and Military History)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지금까지도, 스티븐은 역사 연구야말로 진정으로 가치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예일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스티븐은 대학교수가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스티븐은 정교수직을 제안 받았지만 거절했습니다. 앞으로 30년 동안 똑같은 과목을 가르치고 있을 자신이 없다고, 그리고 본인도 지루하겠지만 불쌍한 학생들은 어떻겠냐고 저에게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 스티븐은 항상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주길 좋아했습니다. 저는 늘 말해왔습니다. 스티븐이 외모는 어려보여도, 생각은 누구보다도 깊다고. 부모님은 제 말에 동의하시곤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스티븐이 어렸을 때부터 매우 사색적인 이야기를 불쑥 불쑥 꺼내놓곤 했다고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스티븐은 항상 ‘지금 몇시에요?’ 라고 묻던 조숙한 아이였습니다. 어렸을 때 저는 스티븐이 왜 항상 이 질문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동생이 왜 그랬는지 알 것 같습니다 – 스티븐은 인생이 얼마나 짧은지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동생은 가까운 사람들에게 그들이 자신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항상 말해준다고 했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매일 말해주어도 충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스티븐이 교수직을 마다한 건 대단한 결단력이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그에겐 다른 대안이 없었습니다. 좋은 직장을 새로 얻을 전망도 당시로선 보이지 않았습니다. 안정된 교수직을 마다한 것으로도 부족해서 스티븐은 다시 한번 모험을 감행했습니다. 박사 논문을 책으로 출판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스티븐은 학생들이 여러 해 동안 힘들게 완성한 박사 논문이 읽히지도 않고 유용하게 쓰이지도 못하는 현실이 못내 마음에 걸렸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외교적 업적을 주제로 한 그의 논문은 한국어와 영어로 된 방대한 양의 일차 자료를 분석한 최초의 글로서, 특히 이전까지 아무도 보지 않았던 이승만 대통령의 사문서를 세밀히 분석했다는 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스티븐은 수년 동안의 노력이 헛되이 되지 않게 하리라 결심했습니다. 그의 논문은 결국 2001년 연세대학교 출판사에서 “Master of Manipulation: Syngman Rhee and the Seoul-Washington Alliance, 1953-1960”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책을 집필하면서 스티븐은 정부기관에서 일할 기회를 찾았습니다. 스티븐은 역사에 대한 그의 탁월한 이해와 지식을 십분 활용하고자 했습니다. 스티븐은 역사를 예술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역사에 대해 뿌리 깊은 편견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들은 ‘그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는건 좋지만 그래서 어쩌란 거지?’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스티븐은 역사는 살아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역사야말로 인류가 가진 유일한 실제 자료라고 생각했습니다. 동생은 본인이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역사를 바꾸기 위한 것이라고 제게 나지막히 말하곤 했습니다.


외교정책 및 정보분야 경력 (스티븐의 과거 동료들과 나눈 대화를 바탕으로)

미 해군분석센터(Center for Naval Analysis)

스티븐은 작전 연구 기관인 미 해군분석센터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맡은 임무는 코소보의 연합국작전, 아프가니스탄의 항구적 자유작전 및 이라크의 이라크자유 작전을 분석하는 것이었습니다. 스티븐은 슈투트가르트에서 미 유럽해군사령부 합참의장 겸 미 유럽사령부 합참의장이 주도하는 가상전쟁훈련에 참여하였고, 미 해병과 도시 전투 훈련에도 참여하였습니다. 9/11이 발생했을 때, 스티븐은 세 명의 친구를 잃었습니다. 스티븐은 아직도 이 사건에 대해 별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언젠가 스티븐이 단호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역사가 이대로 그냥 흘러가도록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스티븐은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 싶었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는 해병대에 지원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았습니다. (스티븐은 오늘날까지도 해병대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항상 해병들은 예수회 수사처럼 멋있다고 말합니다.) 스티븐은 그 나이에 새로운 외국어를 배우기는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중, 로렌스 리버모어 국립연구소 (Lawrence Livermore National Laboratory)소속 누군가가 하버드 대학교의 지인과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게 되었는데, 스티븐의 이름이 언급되었고, 이것은 스티븐에게 새로운 기회가 되었습니다.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로렌스 리버모어 국립연구소에서 북한팀 분석가로 일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로렌스 리버모어 국립연구소(Lawrence Livermore National Laboratory)

스티븐은 그의 연구분야와 배경으로 인해 로렌스 리버모어 국립연구소(이하 “리버모어 연구소”)가 필요로 했던 이상적인 분석가였습니다. 그는 북한에 대한 깊이 있고 창의적인 견해와 한반도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리버모어 연구소 내 주요한 일원으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스티븐은 2002년에 리버모어 연구소에 입사했습니다. 그의 전문지식은 한국을 훨씬 넘어선 것이었습니다. 그는 동아시아 지정학, 특히 대아시아 정책 수립에 영향을 주는 다분히 정서적이고 감정적인 요인에 대해서도 대단히 예리하고 정확한 감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수도 워싱턴에서 받은 교육과 경력으로 인해, 스티븐은 워싱턴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미국의 안보체계에 대해서도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스티븐은 정보당국과 정책입안자들이 어떠한 부분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어떠한 점을 문제로 생각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고, 다루기 힘들어 보이는 북한 문제들로 인한 그들의 고충을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북한의 태도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미국 정책입안자들이 기울인 노력이 대부분 효과가 없었던 것입니다.
리버모어 연구소에서 스티븐은 북한에 대한 정보당국의 이해를 높이는 일에 착수했습니다. 북한 관련 프로젝트를 담당하면서, 그는 기술정보와 관련된 지식을 빠르게 습득했고, 자신이 이미 북한과 관련하여 알고 있던 지식과 접목시켜 북한의 핵무기 프로그램에 대해 보다 폭넓은 시각을 형성해갔습니다. 스티븐의 노력으로 정책입안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정책 수립의 폭은 더욱 넓어졌습니다.
스티븐은 북한 문제를 분석하면 할수록 미국의 정책입안자들이 북한의 핵 정책에 실효성있는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북한 정권을 움직이는 궁극적인 요인이 무엇인지, 북한 정권의 강점과 약점이 무엇인지 등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연구를 통해 미국이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획기적으로 강화할 수 있다고 보았고, 보다 심도깊은 연구를 하고자 했습니다.
스티븐은 북한 주민들이 북한 정권으로부터 받는 탄압과 고통에 대해 깊이 분노했습니다. 그는 북한 정권의 정책과 태도에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스티븐은 북한의 반체제 인사들과 탈북자를 구출하는 일부 인물들과도 접촉을 하고 있었습니다. 북한의 오스카 쉰들러라고도 불리는 전기원씨와 자유북한방송(Radio Free North Korea) 대표 김성민씨와 같은 인물들은 스티븐의 성실함과 인간됨을 신뢰하여 독대를 수락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스티븐과 만난 자리에서 북한과 관련된 그들의 경험과 시각에 대해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스티븐은 북한 주민들의 고통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임무가 북한 정권의 취약성을 철저히 해부하고, 북한의 상황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를 분석하여 정책입안자들이 실효성 있는 정책을 수립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스티븐은 다른 연구원이 대부분 간과하는 북한 내부의 자생적 변화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이러한 자생적 변화가 왜 북한 체제의 안정성을 판단하는 지표인지, 이것이 왜 북한 정권을 동요시킬 수 있는 뇌관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였습니다. 이 보고서는 또한 북한 정권이 권력을 유지하고 핵심 세력을 만족시키기 위해 해외 물자 공급에 의존도를 높이고 있다는 뛰어난 분석을 제공하였습니다. 스티븐은 획기적인 분석을 위해 접근 가능한 모든 출처에서 정보를 수집하였습니다. 스티븐의 보고서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미국 정책의 윤곽을 그려 볼 수 있을 정도로 스티븐의 보고서는 명쾌했습니다. (후에, 별도의 연구에서 스티븐은 그의 분석을 활용한 정책 방향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스티븐은 국방 정책 이사회에서 이 보고서를 발표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스티븐이 발표를 마쳤을때 참석자들은 그의 날카로운 분석에 감탄했다고 합니다. (참석자들은 이런 통찰력 있는 분석은 처음이라고 말했습니다.) 전 국무장관이었던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가 그 참석자 중의 하나였습니다. 키신저는 “내가 들었던 북한에 대한 브리핑 중 최고였네”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뉴트 깅그리치는 “매우 훌륭한 발표였네. 내가 지난 35년간 북한과 그 주변 지역을 예의주시하면서 들은 발표 중 최고였네”라고 했습니다. 스티븐의 발표에 감명받은 키신저는 그에게 다시 한번 발표해 줄 것을 요청했고, 그 자리에는 전 국무장관 조지 슐츠(George Shultz)도 참여하게 됐습니다. 발표 후 키신저는 슐츠 전 장관에게 “조지, 딕(딕 체니 부통령)이 이걸 들어야 해.”라고 말했습니다. 슐츠는 답했습니다. “대통령도 들어야해.” 이후 스티븐은 당시 부시 대통령의 국가안보 보좌관이었던 스티븐 해들리(Stephen Hadley)와 부통령 체니(Dick Cheney)가 참석한 자리에서 다시 한번 발표해 줄 것을 요청 받았습니다.

국방부 장관실 – 총괄평가국 (Office of Net Assessment)

미국 대외 정책에서 내로라 하는 명사들이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그의 발표 이후, 스티븐은 워싱턴 내 수많은 기관에서 일자리를 제안받았습니다. 스티븐은 이를 모두 거절하였습니다. 그는 리버모어 연구소에서 일하는 것이 좋았습니다. 스티븐은 단지 워싱턴에서 일시 파견 형태로 일해도 되는지 양해를 구했습니다. 곧 스티븐에게 굉장한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국방부 장관실 내 총괄평가국을 이끄는 앤드류 마샬이 스티븐에게 함께 일하자고 제안했던 것입니다. 앤드류 마샬은 국방 정책 조직 내에서 탁월한 능력을 바탕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전설적인 존재입니다. 그는 닉슨 대통령 시절부터 총괄평가국 국장이라는 직책을 유지해 왔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경의의 표시로 그를 미스터 마샬(Mr. Marshall)이라고 부릅니다. 미스터 마샬은 가장 뛰어나고 똑똑한 인재만을 뽑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스티븐은 그 동안 정보 부재로 아무도 다루지 못했던 중국의 핵 지휘 및 통제력을 분석하기 위해 영입되었습니다. 스티븐은 일련의 사건들을 예의주시하면서 연관성을 찾아내고, 인과관계와 상관관계를 분석하고, 자료와 자료의 출처를 재검토했습니다. 총괄평가국에서 일년간의 특별 임무를 마친 후, 스티븐은 국무부에서 새로운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국무부(Department of State)

리버모어 연구소 특별 파견근무 형태로, 2008년부터 스티븐은 국무부 내 검증, 준수 및 이행국 (Verification, Compliance, and Implementation Bureau; 이하 “검증국”)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무국은 무기통제, 핵비확산 및 군축 협정과 관련하여 검증 및 이행 준수 정책을 개발하고 집행을 관장하는 부서입니다.
사무국은 광범위한 사안을 관할했습니다. 검증국은 끊임없이 방대한 양의 정보를 검토하고 분석했습니다. 이를 위해 검증국은 다양한 주제를 다룰 수 있는 분석가 그룹(검증 전문가, 기술 전문가, 국가/지역 전문가 및 첩보 전문가 그룹)이 필요했습니다. 스티븐은 검증국에서 없어서는 안될 일원으로 자리잡았습니다. 그는 그만의 독특한 배경과 시각, 다양한 연구경험을 바탕으로 북한 핵프로그램을 포함한 다방면에 걸친 문제에 검증국의 역량을 크게 확대시켰습니다. 또한 스티븐은 다방면에 걸친 정보를 검토하고 검증국 인사들을 대신해 이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받았습니다. 스티븐은 정보분석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였는데, 이는 역사에 대한 그의 해박한 지식, 깊은 문화적 이해, 그리고 예리한 언어적 감수성 덕분이었습니다.
검증국에서 스티븐은 다양한 출처의 정보를 철저히 검토하고, 겉으로는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보고서들을 분석하여 서로 연결점을 찾아내었으며, 방대한 양의 보고서에서 정책입안자들에게 가장 중요하고 의미있는 정보를 가려내고 수집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스티븐은 정보를 분석하여 주요인사들이 활용할 수 있도록 그 핵심을 뽑아내는 데에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였습니다. 스티븐은 본인의 임무에 최선을 다했고, 민감한 정보를 다루는 데에 극도로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이러한 정보를 잘못 다루었을 경우에 발생할 수 있는 결과를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스티븐은 검증국에서 그가 가진 다방면의 재능을 바탕으로 국가 안보 사안, 특히 아시아와 관련된 사안에 대해 자문해 주었습니다. 그는 미국의 국가 원칙과 가능성에 대해 깊은 애정과 신뢰를 가지고 있었고, 대외 정책에 기여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스티븐은 한국, 중국, 일본, 북한, 더 나아가 아시아 지역에 워싱텅 내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도록 촉구했습니다. 심도 깊은 연구와 예리한 통찰을 바탕으로 한 스티븐의 분석을 통해 정책입안자들은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방식으로 아시아 지역을 볼 수 있게 되었고, 효율적인 정책을 수립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스티븐은 미 해군대학과 미 전략사령부가 공동 후원한 핵억지력과 단계적 확대를 주제로 한 가상전쟁게임의 레드팀 리더로 초청되었습니다. [레드팀은 중국, 블루팀은 미국 – 譯註] 이 게임은 팽팽한 긴장 속에서 4일 동안 진행되었는데, 핵무기 지휘 통제, 핵확산 위협, 위협 인지 및 억지 결정 등과 같은 여러 주제를 다차원적으로 다루었습니다. 스티븐은 위기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고 뛰어난 통찰력을 발휘하여 모두의 감탄을 자아냈습니다. 미국의 민-군 정책 결정자들은 스티븐으로 인해 미국이 상대해야 할 적이 어떤 생각을 하고 행동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미국을 이길 수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고 전했습니다.
스티븐의 지칠 줄 모르는 열정과 탁월한 역량은 그가 지금까지 해온 모든 일에 녹아 있습니다. 스티븐은 북한 정권에 대한 그의 모든 지식과 통찰을 미국의 주요 정책 수립과 결정을 위해 바쳐 왔으며, 이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소명을 늘 잊지 않았고, 그의 임무에 충실했습니다.


되돌아 보면서

스티븐의 친구들과 예전 동료들이 스티븐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듣고 나서 제 마음은 자부심으로 가득합니다. 하지만, 제가 제 동생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마음 속에 떠오르는 것은, 손에서 하루도 책을 떼지 않고 읽고 또 읽던 어린 소년의 모습입니다. 철학자와 시인, 장군과 대통령의 말을 인용하길 좋아했고, 텔레비젼 동물 프로그램과 내셔널 지오그래픽과 타임지를 즐겨 보았던 어린 소년에 대한 기억이 먼저 떠오릅니다. 처음으로 영어로 물건을 사러 가던 날, 맥도날드에 저와 함께 긴장된 표정으로 손을 잡고 걸어가던 그 어린 소년이 떠오릅니다. 1987년 4월, 대학교 2학년 재학 중, 뉴욕 타임즈의 편집장에게 보냈던 편지가 뉴욕타임즈에 실린 것을 보고 좋아하던 바로 그 소년의 얼굴이 생각납니다. 퓰리처 상 수상작가인 러셀 베이커에게 편지를 띄워 글을 쓰고 싶은 갈망에 넘치는 데 어떻게 해야 할 지를 물었을때 “쓰고 싶다면, 쓰게. (If you want to write, write.)”라는 답장을 받았다고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던 동생의 표정이 기억납니다. 만화책이나 잡지보다는 니체와 소크라테스 읽기를 더 좋아하고, 어머니가 몇 달 동안 갖고 싶어하시던 선글라스를 사드리기 위해 여름 방학 내내 테니스를 가르치며 돈을 모으던 동생의 조용하고 늠름한 모습이 떠오릅니다. 동생은 엄마, 아버지가 화나셔서 혼나기 전에 제발 집에 빨리 돌아와 달라고 외출을 준비하는 누나에게 간청하곤 했었습니다. 누나인 저는 부모님께 받은 용돈을 며칠 사이 다 써버렸지만, 동생은 꼬박 꼬박 돼지 저금통에 저축하곤 했습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오거스틴과 헤세를 인용하며 가슴 아파하는 누나를 위로해 주던 그 소년. 마르크스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레셰크 코와코프스키를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던 소년. 해방신학뿐만 아니라 한스 우르스 폰 발타자르를 읽던 그 소년. 영어라는 언어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섯 개의 단어는 천주교 미사의 “Through Him, With Him, In Him(주를 통하여, 주와 함께, 주 안에서)” 라고 나지막이 이야기하던 그 소년. 스티븐은 저에게 언제나 그때의 그 소년이지만, 이 소년은 어느덧 오늘날 당당한 어른으로 성장하였습니다.

포도맛 청량음료를 마시고, 자전거를 타고, 야구 카드를 모으고, 깡마르고 햇빛에 그을렸던 아이에서, 스티븐은 지금의 현명하고, 충실하고, 사려깊고, 유머 넘치는 성인으로 성장하였습니다. 미국에 온 첫 날부터 스티븐은 한국을 그리워했습니다. 깊은 밤, 그리움으로 잠이 오지 않을 때는 저와 밤새 언제 어떻게 한국에 돌아갈 것인지를 이야기하곤 했었습니다. 엉터리 영어로 떠듬떠듬 말하고 놀림 받던 꼬마에서, 그는 지성과 교양을 겸비한 유능하고, 성숙하고, 한편으로 겸손한 성인으로 스티븐은 성장하였습니다.
제 마음은 동생에 대한 자랑스러움으로 가득합니다. 동생이 지금의 참혹한 고통에서 벗어나서 그의 고결한 기품을 계속 간직할 수 있게 되길, 다시 그의 사랑하는 가족과 웃을 수 있게 되길, 그리고 헌신적이고 열정적인 그의 삶을 되찾을 수 있게 되길 오늘도 저는 간절히 희망합니다.